설교: "태양의 사모", 2019년 8월 4일, 위니펙 한인 연합 교회에서

설교자: 박하나 (캐나다 연합 교회 목사, Immanuel United Church, 위니펙, 캐나다) 
본문: 창세기 2장 4절에서 25절까지 
제목: 강, 사람,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일시: 2019년 8월 4일, 위니펙 한인 연합 교회 

떨리지 않고서는 못쓰는 이야기와 시가 있다면, 저는 떨리고 눈물이 뭉클 솟아 오르는 느낌을 가지고 쓰는 설교가 있을 수 있다, 특히 한국어로 써 내려가는 저의 일대기이자, 성경 주석이자, 설교라면. 이 것이 제 서두입니다. 영어로는 2012년부터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주 쓰고 나누고 소셜 미디어에 공유 했지만, 우리 말로 하는 설교는 해 본적이 없어요. 이렇게 한자 한자, 한 단어 한단어, 한 문장 한 문장 우리 말로 엮어가면서 저의 이야기와 성경이해를 나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고, 조심스럽고, 고급스럽고, (무슨 우리말 보석 세공사가 된 기분이에요. 우리 말이 보석이죠.) 나의 정서 그대로 한 글자 한 글자 나누고 적을 수 있어서 소중합니다. 한인분들에게 설교를 통해 저의 성찰을 나누는 것은 이 소중한 초청이 정확히 말하면 지난 12년 동안 사실상 처음인데요. (왜 그럼 지금까지 딱 한번 뿐인가? ... 최근 두어 차례 저희 남편이 “불려 갈때”, 가서 교인분들에게 말씀 좀 이렇게 드리라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죠:“참고로 제 아내도 목사인데, 한국말을 할 줄 압니다.”)

저는 2006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왔고, 바로 한 두어 주 뒤 2007년 1월에 밴쿠버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를 시작했습니다. 남편 강민구 목사와 그 때는 7개월 된 아기 강평화와 함께. ‘이민’에 ‘이’자도 모르던 시절, 아직은 ‘헬조선’이란 단어가 없고 90년 대 후반을 강타한 IMF 회오리가 진정이 되가면서 모두들 그래도 한국이 살만 하다고 생각할 때, “한국엔 희망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이모와 친척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는 캐나다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때는 이민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한국을 반드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떠났다기 보다는, 그 때 만 26살, 한국이 아닌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삶의 수순처럼 이어졌기 때문에 삶의 자리를 ‘이동’했다는 정도였습니다. 여하튼, 영어로 하는 설교는 어느 정도 지난 2012년부터 해 와서 틀과 스타일이 세워지고 여러 기술이 많이 늘어 있지만, 제가 한국어로 설교를 해 본 일이 사실상 한번도 없기 때문에, 사랑과 관용으로 응원해 주세요. 그리고 성경과 신학으로 성찰하는 한 개인의 삶의 연대기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한가지 위로가 되는 사실은 오늘 본문, 창세기 2장은 과히 세계의 역사, 세계의 연대기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4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에서 하늘과 땅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부여받고 삶을 유영하는 세계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4절 이후의 창세기 2장 창조 이야기는 생명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필수불가결한 물질 요소, 물 이야기를 시작하고 강들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5절,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을 때,” 6절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10절부터 14절,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그 땅에서 나는 금은 질이 좋았다. 브롤라라는 향료와 홍옥수와 같은 보석도 거기에서 나왔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구스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흘렀다.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저는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 지도, 지형의 형태로 표현이 된다고 하면, 동산은 우리의 정신, 가슴, 생명이다. 에덴은 우리의 영혼의 고향, 보편적 원형이다. 즉, 모두가 이 에덴의 형상을, 아름다운 정원과 땅의 형상을 우리 안에 침해를 받지 않은 모습으로 본연적으로 품고 있다. 그리고 홀연히 땅에서 물이 솟아 시작된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가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그 강은 메마른 것은 적시고, 땅을 돌아서 흐르는데, 그  땅에서는 금과 향료와 보석같은 아름답고 귀한 것들이 많이 나온다. 그 생명의 물줄기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고, 어느 지형, 어느 지대, 어느 땅을 굽이 치느냐에 따라 강의 성격, 특징, 이름, 형세가 달라지는데 첫째 강, 둘째 강, 셋째 강, 넷째 강 하면서 성경의 창조 서사 저자는 네 강의 이름을 모두 알려줍니다: 비손과 기혼과 티그리스과 유프라테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저희를 지으실 때에 이렇게 아름다운, 귀한 것들이 많이 나는, 강의 지형을 복잡하고 다양하고 여러 가지 모습과 이름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강들이 흘러 나머지 세계를 거름지게 하셨다. 한 가지도 아니고, 한 강도 아니고, 네 개나 되는 강…이 우리다. 제 안에 네 개의 강이 있다면,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도 네 줄기의 강의 모습과 보석과 땅의 종류와 여러 가지 강의 길이 있고, 저 분에게도 또 다른 저 분에게서도 강의 지형이 신비롭고 놀랍도록 복잡하고 여러 줄기로 어지럽게 뻗어간다. 생각해 보면, 어지러울 수록 경이롭잖아요? 우리의 존재는 이토록 자유롭고 다양하고 다층적인 것이 당연하고, 물의 지도처럼 확장적인 것이 창조의 질서에 맞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의 물이 모아져 흐르는 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발견하며 저희의 삶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영유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강의 모습이고, 그게 우리의 모습이고, 사람과 에덴의 생명의 지도의 모습이고, 이렇게 이브와 아담과 인간이 자연과 어우러져 소명을 가지고 바람의 기운을 가지고 삶을 시작하고 영유한다… 이 영유는 우리의 꿈이자, 본연의 자세이고 남녀, 젠더, 한 사람의 성향이나 성격 이런 것과 상관없이 모두가 보편적으로 부여받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이 얼마나 아름답게 지어졌는가를 기술한 바로 뒷 부분에서“금지”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에덴의 동산 한 가운데에 세워진 선악과의 근본적 성격은 “금지”입니다. 무엇을 금지하느냐 하는 대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유로운 유영의 동산에 “금지함”이라는 명령이 있고, 어길 때는 처벌과 배제가 파생된다고 하는 룰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한다”고 하는 정언 명제가 무시되거나 도전되어 그 금지를 어길 때에는 그는 또는 그들은 이 자유의 동산에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는 배제와 처벌의 문법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금지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이 창조의 서사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살인인가? 도둑질인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에덴에 “금지함”이라는 것이 있다, 무한한 유영이 아니다. 동산이 생명이 번성하고 자유로운, 보호 받는, 안전하고 거룩한 곳이 되기 위해서, 인간이 자의로 넘어설 수 없는 “금지”가 있다.

이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를, 우리는 우리 삶의 맥락에 서서 우리의 이야기라는 빛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지 자유롭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만약 주어진대로만 창조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이든“금지”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셈이죠. 우리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근원적으로 “금지”의 종교라고 생각하십니까? 에덴의 한 중앙에 심겨져 어기면 처벌과 배제 (영원히 떠남)가 이루어지게 되는 그런 축복과 금지의 다이내믹으로 돌아가는 체제? 많은 학자들이 고심하고 연구하면서, 우리가 창조 이야기에서 길어낼 수 있는 가장 큰 보석은 금지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축복과 본연적 유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환영받고 더 필요하고 더 주목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 다양성, 퀴어 (다양한 성적 정체성, 젠더 정체성), 유색인 등, 자신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로 인하여 처벌되거나 배제되며 “떠나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주체들을 교회가 안고 가고, 이들의 목소리와 강인함과 적극성과 아름다움을 통하여 교회가 도전받고 더욱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꿈이 더 많은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는 현 시대… 금지의 종교가 아니라 유영의 꿈으로, 멋짐으로 돌아가는 종교, 원 축복을 끌어 내 강물이 굽이 굽이 흐르는 것처럼 춤을 추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 이야기를 다시 읽고, 듣고, 토론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해 내야 한다. 여러분과 설교를 나눌 수 있다는 조목사님의 초청을 받았을 때, 바로 두 가지의 이미지를 생각했습니다. 강, 여러 가지 강, 강이 흐른다. 첫번째 강, 두 번째 강, 세번째 강, 네번째 강. 우리는 이렇게 많은 강이 있어야 산다. 그래야 에덴이, 동산이 피어난다. 에덴이, 동산이 더이상 메마르지 않다. 그리고 한번 흘러가기 시작한 강, 자기 길을 만들어 가고 있는 그 강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이 흐르라고 한 강.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을 때 땅에서 솟아서 온 땅을 적시라고 흐르게 한 강. 강 때문에 사람 있고, 사람이 있어 동산이 더 들썩 들썩 소리나고, 더 즐겁고, 하느님이 더욱 더욱 행복하셨다. 강이 여기서 뭔가? 우리에게 강이 있는가?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네 개… 다섯개… 우리들 안에 흐르는 강은 더 많아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너의 강은 흐를 수 없다” 라고 금지하는 것은 에덴의 원축복이 아니다…

창세기 2장 창조서사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또는, 창세기 2장 창조서사를 읽는 전통적인, 정통적인, 문자적인 방식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그 금지가 여자가 손을 뻗음으로 깨진다고 하는, 여자로 인하여, 남자 역시 죄로 물이 들고, 그리하여 고통과, 처벌과, 범죄와 폭력의 혼란의 에덴 밖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라고 하는 원죄론의 발생입니다. 교회에서, “여성들, 너희 존재들이 죄의 시작이야” 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여성이 조용해야 한다, 여성은 순종적이어야 한다, 여성은 이끄는 것 보다는 뒤따라야 한다, 목사의 아내는 남편인 목사를 내조 해야 한다,”심지어, “사모님, 사모님은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아요. 사모님은 늘 웃는 천사입니다!” 남성 신학교 학생들과 전도사님들은 졸업과 함께 곧 이어 준목, 부목사, 목사 이렇게 수순을 밟고 상황이 어쩐다 싶으면 유학도 가고, (그것도 가족 모두 이끌고 유학을 가고), 여성인 신학교 학생들은 그늘, 그늘이 진 것처럼, 전도사님을 하시다가 준목이 될지, 부목사는 될 수 있을지, 목사는 될 수 있을지, 근심, 걱정, 앞 길이 불투명하고, 그러다가 남편이 부목으로 가는 교회에서 “사모님이 다른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은 맞지가 않다. 사모님이 남편이 사역하는 교회로 오시지 않는다면, 목사님을 쓸 수 없다.”이런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모님은, 사모님은, 말하면 안된다. 말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사모님은 다른 교회에 계실 수 없다. 사역할 수 없다. 저도 이런 분들 만나봤어요… “네? 사모님이 목사님(이시라구요)?” (충격을 받아서, 더 이상 말을 잇기 어려워 하심. 머리 속에서 정리가 안되는 다수의 분들을 만났음.) 이러한 반응들과 태도들이 모두 창세기 2장에서 “여자로 인하여”와 가부장제가 만나는 데서 나오는 결과이고, 태양을 달이 되게 불을 꺼버리고, 강을 흐르지 못하게 하는 교회 안의 “여성 혐오” 입니다. 보수적, 전통적 신학에 따르면 우리가 에덴 밖 세상으로 타락하게 된 것이 여자가 속임을 받아 손을 뻗은 일로 시작하였으므로…  여자가 금지의 거룩한 명령을 어겼으므로…

제가 지인들 몇분에게만 조심스럽게 말 한 게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활발하고 열정적이고 많은 역사적 과업, 민주주의, 자유독립, 의료 문화 등, 역사에서 이룬 일들이 많이 있지만, 기형도 많다는 것은 다 아실텐데요. 우리 몸의 뼈를 엑스레이찍듯이 한국 교회를 엑스레이 찍으면 이거다. 이게 뜰꺼다. 가부장제.

전 한국 개신교회 경험 전무로 자랐는데요, 개신교회는 남편인 한국 기장 교회 목사님께 결혼해서 4층 교회 건물 옥상 가건물에서 신혼 생활 딱 2년 경험하고 남편과 7개월 아기와 함께 캐나다로 떴습니다. 지금부터는 ‘제 강이 흘러야 제가,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떠난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분투(Struggle)’하는, 했던, ‘태양의 사모’ 이야기를 좀 해드리고 싶어요. 한국이 제게 금지, “내 뒤로 모든 문들이 닫혀 버림’의 상태, 를 의미 했다면, 캐나다는 반대로 금지된 것들이 가능했고 독립과 유영의 길을 열어준, 시작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되었다고 말씀 드릴 수가 있겠어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캐나다에 왕성하지만, 적어도 태평향 반대 쪽 이 땅에선 본래 태양인 여성을 달로 바꾸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1979년 제가 태어난 후 2007년까지 대략 28세까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성찰을 나눌텐데요. 다음에 또 불러 주시면, 2007년 이후부터 2019년까지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강의 이미지는 강에 강한 바람 없어 잔잔하고 자잘한 물 주름만 수천 개 잡혔다 펴졌다 하는 날, 눈부신 정오의 태양이 비쳐서 강 수면이 거울이 햇볕을 받으면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만큼 반짝 반짝하는 것처럼 눈부시게 주름 잡힌, 비단처럼 조용히 흐르는 강의 모습인데요… 그런 정오의 태양이 하느님이 우리 영혼에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에 다 있는데, 사람에게도 있고, 퀴어에게도 있고, 여성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을 정현경이라고 하는 현재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원 종신 교수가 아시아 여성들을 위한 해방 신학의 모습은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한 분투 (struggle to be the Sun again)”의 여정에 잘 나타난다고 했고,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한 분투가 제 삶과 신학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서, 제 영혼과 영성, 강과, 지대와, 땅과 우주의 지도를 다시 그리도록 도와준 표현입니다. 한 연합 교회 남성 교인분이 그러시더라구요.“우리 아내는 이미 집안에서 우리집 태양인데” 하시더라구요. 근데 태양이란 “우리 아내는 이미 우리 집에서 자기가 원하는 데로 한다, 오히려 남편인 내가 힘이 없다” 이렇게 쓸 수 있는 태양의 의미가 아니구요. 제가 생각하는 태양이란, 하느님이 주신 자기 자신의 본연의 상태, 아이덴티티, 영혼의 원형 (원축복)을 찾아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 자기를 창의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외부나, 세계, 사회, 공동체로부터, (교회로부터) 금지의 명령, 처벌의 협박, 배제의 위험, “이 곳에 다시 들어 오지 못한다”라고 하는 권위의 목소리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안전하고, 해방된, 억압하는 힘과 맞서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예언자적 태도를 세울 수 있는 태양의 힘이다. 그래서 세상의 강들을 반짝 반짝이면서 흐르게, 덥힐 수 있는 희망의 상징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한 스트러글’이었던 제 이야기는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카톨릭에서 자랐고 제가 피아노를 좀 쳐서 토요일 어린이 미사 예배팀에서 반주도 하며 재밌게 자라고 있었는데요. 어느날 오후, 햇볕 비치는 날, 차 없는 성당 주차장에 서서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신부님이 된다면 어떨까?” 신부님이 된다는 건 기가 막힌 생각이었죠. 저는 성찬의 전례 (성만찬)을 좋아 했는데, 동그란 밀빵이 혀에 녹을 때 달콤하고 빨리 녹아 아쉽고 그렇거든요. 신부님들은 늘 가장 큰 밀빵을 여러번에 부셔서 먹죠. 그 다음 이어진 생각… “아, 맞다. 내가 남자가 아니지. 수녀님이 된다는 건 어떨까? 아이고. 수녀님들은 아이를 안 낳지. 그리고 신부님 돕는 역할만 한다. 나는 내 아이를 나아서 내 자녀가 내 계보를 잇게 하고 싶은데.” 이렇게 불현듯 든 소명을 발견한 순간을 ‘남자가 아니니까’ 라는 이유로 그대로 기억에 깊이 깊이 덮어 묻어 버렸죠. 한동안 성당 주차장에서 이 생각을 했다는 것을 잊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79년생인데, 유치원 때 기억은 사진 없이는 아무 것도 나지 않는데, 생생한 것 중 하나가, 병원 역할 놀이 시간이었는데, 남자아이들은 의사를 시키고 여자아이들은 간호사를 하라고 해서 매우 상심했던 기억. 매년 제사 때는 제 남자 동생을 포함해서 남자 사촌들은 제사상 앞에 먼저 절 하러 나가는데, 오직 혼자 여자인 저는 뒤에서 보고 있다가 뒤에 절 하러 가게 했던 기억.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족보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시길래, 얼른 우리 집안 것을 찾아 봤는데, 가족 이름들에서 동생 이름만 있고 제 이름은 없어서 매우 강하게 항의했던 기억. 명절 때 할머니가 남자 사촌들에게는 세뱃돈으로 만원씩 주고 저는 오천원을 줘서 매우 분노했던 기억. 사소하고 작은 일상,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사회 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의 소모형이기도 하죠?

2002년엔 “집사님, 권사님, 목사님” 이렇게 어린 아이가 단어 배우듯이, 그땐 연애하던 남편, 남자친구 (오빠)의 입에서 떨어지는 단어들을 이게 뭐야 저게 뭐야 하면서 하나 하나 주워가며 배울만큼 개신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던 제가, 2004년, 결혼 한달 전에 부목사로 목사 안수를 받은 개신교 기독교 장로교회 젊은 목사와 혼례를 하고 4층 교회 옥상 가건물에서 2년 살면서 제가 변해갔습니다. 태양에서 달로. 처음에 결혼을 하겠다고 가족, 친구, 친지들에게 알리자, 개신교회를 잘 아시는 분들 수순으로 환영과 우려가 번갈아 전달 되었습니다. 독실한 개신교인인 저희 작은 아버지의 대환영부터 (대신 “사모님”이 되는 과정을 잘 알아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사랑 가득담은 응원), 중산층의 삶에서 떨어질 것 같다고 우려하는 친한 친구들의 걱정어린 비환영까지… 그런데 저는 자신있었어요. 원래 전 자신있는 사람입니다. “난 잘할꺼다. 사모? 난 교회에 있는게 일단 재밌고, 사람들을 기쁘게 잘 맞춰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해서, 하라면 하지. 새벽기도회도 가고, 찬양대도 신나서 하고, 수요예배도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청년들과 같이 제자훈련도 하고.” 다른 분들이, “사모님, 교회 생활 힘들죠?”그러면 저는 “아니요, 재밌어요!” 그러면서. 저는 어렸고, 늘 웃어주었고, 내 진짜 생각, 내가 진짜 보는 것들, 내 진짜 관점, 관찰을 말하지 않고, 다른 분들이 남편 목사를 칭찬하면 같이 칭찬하고, 교회 안에서 일하시는 집사님들이 점심 같이 하자고 교회 부얶으로 부르면 내려가서 같이 점심 먹고, 눈치봐서 설겆이를 해야 하나 주섬주섬 일어나고, 제가 잘했기 때문에 모두들 저를 예뻐하고, 귀엽게 봐주셨어요. 그러다가 가깝게 도와주시던 남자 교인분이 “우리 어린 사모님은 웃는 천사야.” 할 때, 아.. 뭔가 이건 아니다,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2년 쯤이 지나갈 때는 제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 잘 지내고 있는데, (같이 계시던 사모님들, 우연히 본 다른 사모님들의 표정은 정말 좋지 않았어요.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분들이 없다.) 내면에서는 “불안”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8차선 오르막길 옆이었는데, 대형 트럭이라도 지나가면 철판 가건물이 진동하고 흔들리면서 골이 흔들리는 것 같은 신체적 영향도 한몫을 했던 것 같고, 불안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한번은 엄마가 물려 주신 묵주를 손에 잡고 눕지 않으면 불안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빴죠. 남편 목사는 나날이 교회의 왕자가 되가고 있는데, 저는 외로움과 고립, 불안… 일상적으로는 즐거운 일이 많았는데, 가건물 탈출해서 이사도 가고, 첫째 아이도 출산을 했구요. 유학을 대비해서 임신 중 토플 준비도 잘 했구요. 이사 후에는 불안증은 사라졌어요. 하지만, 자신있고, 적극적이고, 지성적 분석력이 높고, 독립적이었던 제가 결혼과 교회 생활 2년을 겪어 가면서, 소극적이고, 불안해하고, 의존적인 성향으로 변화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즘, 별 별 소리를 다 듣기 시작했습니다. 가건물에서 나온 뒤에는 교회에서 마련해준 재건축 직전의 (벽돌 벽에서 바람 솔 솔 들어오는) 사택으로 이사를 갔는데요. 동네 아주머니가, “쯧쯧, 석사 학위를 가지고도 아기 하나 가지고 여기서 사는구나.” 친척 큰 어머니가, “쯧쯧, 너 대단했는데. 부모님이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데, 니라도 갈 곳이 없구나.”

어느날은 아기를 친정 엄마가 봐주시는 사이 친정 부모님의 아파트단지 놀이터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데, 명확한 생각 하나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거죠. 한국에서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아기 하나를 가지고 젊은 여성이 있다는 것은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주변화의 상태로 빠지는 길이구나. 내 뒤로 내가 갈 수 있는 길과 문이 다 닫히는 것이구나. 다시 말하면, 직업이 있으면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가부장제적 역할에 어느 정도 저항하거나 거리를 둘 수 있는데, 직업은 없는데 아기가 있으면 여성은 가부장제에 빠지게 되는거다.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전통적으로 기대받고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여야 하게 된다. 그게 선명한 생각으로 제 뇌리에 처음으로 부딪혔습니다. 

그즈음 우연히 한 책을 발견했습니다. 정현경 유니언 신학 대학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엮은 책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아시아 여성이 하느님의 해방의 사랑을 경험하고 변화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가 되는 신앙과 영성, 사회적, 정치적 길에 대하여 각 아시아 나라들의 여러 여성들이 발전시킨 신학을 정리한 이 책. 남의 집에서 딱 한 페이지 읽었는데, 그 딱 한페이지가 강렬한 인식을 주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인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는 동일한 제목의 시에서 따온 것인데요. 1900년 일본의 여성의 시입니다. 

원래 여자는 태양이었다
그는 참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자는 달이 되었다
그는 다른 것에 기대서 살며
다른 빛을 반사해서
빛을 낼 뿐이다
그의 얼굴은 창백한 병색이다
이제 우리는 감추어진 태양을 다시 찾아야 한다
(중략)

원제 "the hidden sun" - hiratsuka raicho

이 한페이지, 이 시를 읽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처음으로 이미지와 비유를 통해 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 내가 스스로 빛을 밝히는 태양에서 다른 것의 빛을 반사해야만 창백한 빛을 내는 달이 되었구나. 지금의 나는 하느님이 처음 우리와 땅과 세계를 창조하고 지으실 때에 “좋다, 선하다”라고 했던 그 원축복으로서의 충만한 에덴의 상태가 아니라, “금지”에 두려워하고 “금지”에 불안하게 된 선악과가 포커스가 되버린 에덴의 상태가 되었구나. 

두려워 하지 않고,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한 여정을, 활동을, 믿음을 시작해야겠구나. 

저는 그때까지는 부정적이고 어둡고 힘든 감정을 꺼내서 남과 나누는 것을 잘 하지 못하고 매우 어려워 했는데, 남편에게 내 마음의 상태를 나누었고, 그 놀이터에서 대화를 하던 중, 남편이, “그러지말고, 너가 목사를 하는게 어때? 나는 부부 목회자가 참 멋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라고 말했고, 저는 한번도 생각조차 못해봤던 가능성을 담은 말에 매우 깜짝 놀라고 충격을 받았죠. 가톨릭에서 자라 여성 목회자를 본 적도 없고 여성 신부님은 더더욱 제 세계관을 180도 뒤바꾸지 않고서야 생각해 본 일이 없던 터라 매우 놀랐지만, 바로 이해가 되었고,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성당의 주차장에서 생각했던,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해서 마음 속 깊이 묻었고, 그래서 덮어졌고, 그래서 지워졌고, 그래서 잊었던 소명이 떠올랐고 기억했고, 확신했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태양이 되는 길이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동일화를 시키는 것은 맞지 않지만, 그 한 부분으로서 확실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캐나다로 떠났고, 남편이 밴쿠버 한인 연합교회의 청소년 리더로 청빙되서 가는 것을 계기로 밴쿠버 신학교에 바로 등록하여 목회학 석사를 시작하게 된겁니다. 

캐나다에 온 후 12년 동안 “왜, 어떻게 해서 캐나다에 오게 되었냐”는 질문을 많은 분들이 하셨는데, 아무리 가까운 지인분들이라도 이 이야기를 다 하는게 부담스러워서 형색에 맞는 간단한 말들로 짧게 대답해 주는 걸로 일갈했는데, 이번에는 꼭 이 태양의 사모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던 이유는, 경험을 통하여 진심으로 교회 변화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를 쓰고 나누면서 무한한 힐링을 경험했습니다!

한국 교회를 엑스레이 찍으면 뼈대 하나가 나오는데 그게 가부장제고, 군사문화와 접목된 가부장제, 담임 목사 일인을 중심으로 그 밑 부목사님들, 그리고 숱한 여성 사역자들의 희생과 그늘, 그리고 사모님들… 그런 체제. 똑똑하고 목회를 너무 잘할 여성 신학생들이 남성 신학생과 사랑하게 되고 가정을 이루고는 남편은 계속 목회자의 길을 걷는데, 여성은 끝까지 가시는 분이 적어요.

한국에서 개신교회 2년, 그 후 한인 연합 교회에서 2년 동안 “이브”로 살아 봤어요. 금지… 귀로는 듣지 않아도 몸으로 다 들었습니다. 그 문법요. 당신은 사모로서, 여성으로서 “해서는 안된다”고 했던 것들, (요약하면, “봐도 안본 듯, 들어도 안들은 듯, 말할 수 있지만 말 안하기”) 을 이기고, 하면, 시도하면, 비판의 화살을 받을 수 있는 “이브”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교회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제대로 공부하면 여성주의와 다양성은 교회의 문화를 바꾸고 체질을 개선합니다. 

이브의 뜻은 생명입니다. 이브는 토론할 수 있고, 이브는 손을 뻗을 수 있고, 이브는 고통이라는 처벌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브는 금지의 명령때문에 불안하지 말아야 하고, 이브는 선악과 나무 앞에서 하느님과 토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금지하셨죠? 진정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저에게 가능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담과 이브는 동등해야 합니다. 사모란 존칭일 수는 있지만, 사모라는 성경에 근거한 직책이나 위치가 있는게 아니다. (사모는 있는데 사부는?) 태양의 사모는 동등한 평신도로서 (또는 사역자로서) 내면으로부터 발휘되는 태양을 가슴에 품고, 그 태양으로 강들을 덥힙니다. 우리 모두 처럼,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래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주 많은 강들이 있어야 하고, 땅을 적시면서 여러 지형과 지대를 휘감고, 그래서 정말로 귀하고 이름도 희귀한 수많은 하느님의 보석들이 많이 많이 많이 나오게 하고, 흐르는 강들을 모두 반짝 반짝 반짝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에덴의 자녀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의 동등한 보편적 소명이므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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