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ing Lois Hector: Love Will Not Pass (1 Corinthians 13)

 

And now faith, hope, and love abide, these three;
and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1 Corinthians 13.13

In a recent Korean drama – now on Netflix --, Ye-jin is ready to start her paragliding on a very windy day. It’s not a perfect day for flying, but she is persistent, and says to her friend: “Do you know why the wind blows? It is to pass, not to remain. Because it blows, I can fly too.” Koreans like to say, “Everything shall pass.” Struggles and hard times shall pass. Even Covid, in the end, shall pass. Of course, it will alter our lives to some degree. A gathering limited to just 50 family members and friends to celebrate the life of a person so beloved is not the perfect way to share this time of loss. It’s not what we expected; it’s not what we wanted. We are very fortunate though, as we have Rachael with us, singing these hymns of love on behalf of us all. And yet, even this time shall pass too. Covid will pass. Our sorrow and grief are intense now, but our deep emotions will eventually be embraced in love and cherished and shared. We will continue to create and weave new stories of love as a family, even after this moment of emptiness and loss. “Everything shall pass”. Every temporal thing will pass. But, Love will not. Love will remain. Love will abide. As today’s reading tell us, “Love never ends.” “The partial will come to an end” but the complete, the whole of the love we’ve known through and with and from our loved ones, especially Lois, will not end. It will not pass. It will be the strong and beautiful root and foundation of our continued writing and singing of a new song of faith, hope and love, as a family, as a community.

Today’s reading says, “And now faith, hope, and love abide, these three; and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Love is constant, reluctant to change. Love is patient, reluctant to hurt. Love is kind, reluctant to be envious, arrogant or rude. We hear that love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And yet, we know. We have learned this. Love is not just soft. Loving is risky and adventurous. Sometimes loving is hard and impossible. We cannot enter into it without being changed. Altered. Transformed.

Loving is never just about opening our hearts. It’s about being willing to have our hearts become larger as we make room for new people and new stories and new experiences. Loving is about being willing to let our hearts be broken and remade as we take in not only the brokenness of the world but also the beauty of it, the astounding wonder that will not allow us to remain the same.

Today, we celebrate one who had lots of love and “loving” for the world, for those around her, families and friends, community of faith and God. Lois had lots of love, loving, for Glen, since they met at Winnipeg Roller Rink, for the next 60 years of their lives together. Lois kept him in love and amazing care for his last 13 years. Lois had lots of love for her three sons, Ron, Carl and Gerry, and their spouses and children too. Lois was an amazing home-organizer through her trademark efficiency and pragmatism, excellent problem-solving skills and calm presence, and also through her non-judgmental, warm, peacemaking practices. Lois was always ready to offer her presence and help to her family – dropping off and picking up her beloved grandchildren and looking after them was her great joy. She had lots of love for the world as well – Lois kept up with newspaper subscriptions and read the papers avidly every day until she left her beloved home where she had raised her family for the last 65 years. All these numbers help to explain about what kind of life Lois lived: deeply rooted, lovingly involved.

I knew Lois from church as her last minister at Immanuel. Lois was an active member of our church since 1961. I could sense her wide and deep love for the world and for our community whenever I saw her at church. I had opportunities to talk with her after the service, just before Lois was going to be picked up by her sons. Even before I found the moment to make eye contact with her and smile, she would smile first, before me, with her big eyes, and say a few words of encouragement and kindness. Lois was very gentle. Very warm. She knew us - she loved us.

The present time is like a very windy day for us. Will this wind push us back or carry us forward? The pandemic hasn’t passed us yet. It is always difficult to say good-bye to our loved ones. Loving is beautiful, stunning and hard. In the Korean drama I mentioned earlier, Ye-jin says that the wind blows, only to pass; it does not remain. These hard circumstances shall pass. We will eventually fly and reach the destination we hope for. In the meantime, take courage to spread your wings and love the sky. Imagine the aerial view you would see and enjoy from soaring upwards. Above the clouds of grief, we will learn the beauty, the simplicity, of loving each other despite challenges so that when our feet touch the ground again, we remember not just what love is, but what love is supposed to be.

 

Love will not pass; Love abides. Especially the love that is faithful, which Lois showed us all, the love, and the loving, into which we cannot enter without being changed. Altered. Transformed.

 

Here’s the blessing, written by Jan Richardson. I hope this blessing shares with us the deep peace of Christ and comfort from the love of God where Lois now rests in peace forever.

 

Blessing That Meets You in Love

 

It is true that

every blessing begins

with love,

that whatever else

it might say,

love is always

precisely its point.

 

But it should be noted

that this blessing

has come today

especially to tell you

it is crazy about you.

That it has been

in love with you

forever.

That it has never

not wanted

to see your face,

to go through this world

in your company.

This blessing thought

it was high time

it told you so,

just to make sure

you know.

 

If it has been shy

in saying this,

it has not been

for any lack of

wanting to.

It’s just that

this blessing

knows the risk

of offering itself

in a way that

will so alter you—

 

not because it thinks

you could stand

some improving,

but because this is

simply where

loving leads.

 

This blessing knows

how love undoes us,

unhinges us,

unhides us.

 

It knows

how loving

can sometimes feel

like dying.

 

But today

this blessing

has come to tell you

the secret

that sends it

to your door:

that it gives itself

only to those

willing to come alive;

that it vows itself

only to those

ready to be

born anew.

 

—Jan Richardson

 

한인 연합 교회 설교 - "갈망" - (Sermon at Korean United Church), John 4: 1-29, August 3rd, 2020

안녕하세요

이맘 때의 여름, 위니펙 한인 연합 교회에서 초대해 주셔서 설교를 나눈지 1 만에 다시 찾아 뵙네요. 작년 여름, 여러분께 저의 첫번째 우리말 설교를 나눌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셨는데, 올해 여름 다시 돌아와 번째 기회를 갖습니다. 고맙습니다.

 

때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지금 자리에서도, 마음 속에 떨리기도 하고 제일 조심스러운 것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하는 마음이에요. 제가 어떤 말씀을 나누면 위니펙 한인 연합 교회 교우분들이 싫어하시는게 있을 거다라는 걱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왕 소중하고 아름답고 내게 제일 익숙한 우리말로 설교를 하는데, 단어, 단어, 가지 고민, 가지 질문을 나누더라도, 영양가 있는 치아 씨드 알갱이 같은 말을 나눠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한여름이니까 시원한 설교가 좋지 않겠냐는 지인의 조언도 있고, 제가 최근 치아 씨드를 발견한 이야기로 서두를 열어 볼까 합니다. 이게 치아 씨드에요. (보여드린다). 안보이죠저희 집이 최근에 이사를 하였는데요, 이사를 끝내고 나니, 아이들 먹이는 욕심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여러 가지 신기한 스무디 만들기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수퍼 푸드로 만드는 스무디 책에서 치아 씨드라고 하는 수퍼 푸드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어요. 건강에 좋은건 물론이지만, 깨보다 작은 치아 씨드는 먹을 있는 씨앗 가장 작은 종류들 중에 하나라고 해요. 중앙 아메리카 토착 음식으로, 아무 맛이 없서 무슨 음료에 넣어도 맛의 변화를 주지 않지 않으면서도 영향을 끌어 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헬쓰 베네핏 이외에도 수퍼 푸드로서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점액성입니다. 고무풀이라고도 한다는데, 점액성이 자기 질량 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수분을 보유할 있게 도와 주어서, 알당 15분만 속에 잠깐 담가 두어도, 자기 무게의 10배에 가까운 물을 흡수해서 작은 볼처럼 있다고 해요. 탱글탱글하니, 입에서 젤리 볼처럼 굴릴 있다는 거죠. 설교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교회 밖에서, 우리들이 쓰는 하나 하나가, 우리가 다른 이애게 건내는 하나 하나가, 치아씨드 알갱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려주는 복음의 생수를 10배씩 머금어서 저희의 삶과 이웃의 삶의 갈증 시원하게 해소해 주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봅니다.

 

작년에 제가 여러분들을 찾았을 때는,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남자 목회자와 결혼을 하고 교회 건물 4 옥상 옥탑방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고 교회 안에서 항상 웃는 천사같은작은 사모로 2 정도 살고 끝에는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아기를 가지게 되면서 사회와 교회의 가부장제라는 실재를 구체적으로 맞닥뜨리고 영향을 받게 되죠.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젠더 역할에 빠지게 되고, 나의 미래를 위한 나에게 열려 있는 문을 찾아 없었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진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기 결정적이었던 젊은 여성, 제가, 2년이 지난 수동적이고 불안한 성격으로 변해가는지 스스로 놀라게 되었습니다. 가부장제를 직접 경험하면서 다른 이의 (배우자 남편 목회자의 ) 반사해야만 희미하고 창백하게나마 밝을 있는 달이 되었다가 나의 존재 자체에서 빛을 밝힐 있는 해가 다시 되는 여정을 위하여 2007 캐나다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고 밴쿠버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여기까지 이야기 드리고 나서, 다음에 위니펙 한인 연합 교회로 저를 불러주시면 2007 이후의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렸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 후에 일어난 일들이 너무 다양하고 감정이 많이 들어가게 되서 어떻게 줄거리로 요약을 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안에서, 기도 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 제게 중요한 생각들을 나누는게 좋겠구나 하고 판단했어요. 저의 치아 씨드 알갱이 같은 고민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영양 음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근 성찰해 보고 있는 저의 주제는 안에 거짓없이 솔직하고 진실한 갈망이 무엇인가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고민하고, 기억하고, 발견하고, 보듬어 보고, 빛을 비추어 보고, 알고자 노력하며 질문을 하는 상태를 깨어 있어서 유지 해야겠구나, 이것을 해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저의 삶에서 타오르는 덤불 찾는 하느님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자, 내가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에 의미있게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이자, 이로써 삶과 몸과 마음이 건강할 있는 구심점이다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느낍니다. 그러한 갈망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도 여정을 필요로 하고 시간과 노력, 기도와 집중이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갈망을 표현해내기 까지는 굉장히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확신, 믿음, 그리고 길을 응원해 있는 우정의 공동체가 필요하다제가 속하고 싶은 교회 공동체는 서로에게 그러한 우정의 공동체가 되어주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목회의 길을 준비를 시작한 2007년부터 오랫동안 제가 집중한 부분은 그대로 목회자가 되기 위한 이었죠. 목회자가 되겠다, 이러한 선언은 갈망이라기 보다는 목표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목표는 제가 가부장제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는 길이기도 했구요. 예를 들면, 신학교에 재학 중인 시절에도 한인 교회 교우 분이 굉장히 겸손하고 부드러운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도, “사모님,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시면 무엇을 하려고 그러시느냐 물으셨으니까요. 제가 신학교에서 목회자 과정을 하는 때에도 제가 설마 목사가 된다고는 생각을 못하신 거지요. 제가 여성 이기도 하지만, 결혼한 여자, 특히, 사모이기 때문에. 아무튼, 그때는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이냐는 질문, 목표만으로도 충분히 살아 있고, 충분히 바쁘고, 충분히 대단했는데, 나를 위한다는 목표는 결국 영원한 생수를 수는 없었습니다. 목사를 한다는 것이 갈망이라면, 제가 충분히 행복해야 하는데, 현재 제가 섬기는 제가 일하는 교회의 교우분들, 거의 모두 백인인데, 아무리 좋으신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직업의 임무를 케어 안에 있는 분들의 필요를 돌보고 뜻을 받들고 그들이 생각하시는 교회는 어떠해야 한다는 바람과 열정을 이루어 들이는데 촛점을 맞추다 보면, 존재의, 안의 깊은 곳에 있는 저의 존재적 갈망은 계속 소외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질문은 달라졌습니다. 8년전 그때의 질문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이었는데, 저의 현재의 질문은 나는 무엇을 원하며 바라고, 무엇이 내게 가장 의미와 기쁨과 즐거움을 줄것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며, 나는 세상이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참여하고 싶은가로달라져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다층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의 전체와, 제아이덴티티, 자신의 갈망을 통하여 세계에 참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점에서 믿음이 작동하는 부분은, 하느님은 나에게 지극한 관심과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나의 이웃의, 여러분 모두에게 그러하듯이. 내가 나의 깊은, 진실한, 솔직한 관심과 사랑과 열정을 표현할 , 나의 질문과 갈망이 나에게 열정을 가지고 있는 하느님과의 연결고리이다.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믿음의 과정 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갈망이 확실히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뚜렷한 해답이나 명쾌한 답은 없습니다갈망은 느끼는 것이고, 느낀다는 것은 존재의 외침이고 표현이며, 나는 세계에 나의 존재로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하는 미래를 향해 열어가는 질문이 나에게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하느님과의 연결 고리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미래를 향하여 갈망 할때 - - 정의, 포용, 평등, 사랑, 자비, 존중, 화해, 일치와 같은 - - 비로소 하느님은 나와 나의 이웃과 우리의 세계를 향하여 얼마만큼이나 강렬한, 열정적인 사랑과 관심과 갈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발견할 있게 됩니다열쇠가 없는 문을 열고 누룩이 없는 빵을 반죽하고 이러한 시도들, 궁금해 한다, 포기 하지 않는다, 열망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모일 ,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열리고, 정의롭고 포용적이고 평등하고 자비롭고 화해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움직여 간다고 믿습니다

 

예전엔 제가 무엇을 원한다, 갈망한다, 궁금해 한다, 시도해 보고 싶다, 뭔가를 누군가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는 그러한 감정과 느낌을 조금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선을 넘으면 나의 안전을 해치게 될꺼라는 걱정이 많았고, 게다가 선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것도 선으로 보이고, 저것도 선으로 보였죠. 그래서 이왕이면 안에 있으려는 경향이 컸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안정과 유지, 이것과는 다릅니다. 복음을 알아갈 수록 복음은 인간의, 예수의, 하느님의, 원함, 바람, 갈망, 갈증, 배고픔, 열정, 사랑으로 나와 다른 이웃을 만나게 합니다. 항상 안정적이고 항상 편안할 만은 없죠. 

 

얘기로 시작하느라 오늘 복음 말씀 나눔이 조금 늦었는데요. 사마리아 여인 본문은 복음의 이러한 퀴어한 성격이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다른 이에게 다가가게 하는 필연적 사유를 만들어 내게 하는, 갈망, 목마름,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필요를 상기시키고. , 복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상황은 목마름을 낳는 한여름의 불쾌한 뜨거움과 오랜 여행의 피곤함에서 시작됩니다. 치아씨드 스푼은 넣은, 영양 많고 시원한 스무디가 여러 필요한, 계시적 스토리입니다

 

일단 퀴어라고 하는 단어부터 정의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특히 최근 LGBTQ 공동체와 개인들이 스스로를 퀴어로 지칭하는 움직임이 매우 보편적이 되었습니다. 본래 오래전부터 퀴어란 단어는 이상하다, 특이하다, 불화하다를 의미하며, 굉장히 꺼림찍 하고 특이한 상황,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 LGBTQ 혐오하는 말로 쓰여왔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이에 반기를 들듯, 퀴어란 단어를 LGBTQ 공동체가 스스로를 자신있게 그래, 우리가 그렇다”, “우리가 퀴어다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아이덴티티 표현어로 새롭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굳이 퀴어신학이 아니라도 하더라도, 최근의 신학은 퀴어라는  단어가 선언하는 의미를 받아들여서 성서 해석에 곧잘 쓰이고 있습니다. 복음과 퀴어를 연결 시키는게 처음 들었을 어색하게 들릴 있지만, 연결점이 있어요

 

예수와 함께 시작된 복음 선포는 전통적인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굉장히 특이하고, 일반적이지 않고, 규율과 관습, 종교, 전통에 어긋나고사회에서 배척된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많이 일어나 퀴어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복음 활동도 그렇게 생명을 살리는 일에서만큼은 평등과 사랑, 평화와 존중의 지혜가 번영하도록 퀴어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에서 복음의 퀴어적 해석이 조금씩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퀴어란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 적합하다고 하는 , 우세하고 지배적이라고 하는 것과 차이를 드러내는 말합니다. 불화합니다. 상이하고 갖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그런데 또한 억눌리고 놀림 받고 배척 당하는 명을 모두 존중하고 살아나게 합니다.


흐르는 눈물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하늘 땅을 노래하는 예수는 이러한 정의의 의미에서 퀴어적이다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예수는 유대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본향으로 떠나고 있는 중에 여행이 길어져 무척 고단하였던 예수는 태양이 정수리 위에서 바로 내리 쬐는 뜨거운 정오에 사마리아인들의 도시 수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고, 야곱의 우물가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먹을 것을 찾으러 마을로 들어가 예수 혼자 남아 있었구요. 여자가 우물가에 왔는데, 예수는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청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본문, 유명하고 사랑받는 복음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최대한 여성 혐오를 배제하는 성서 읽기를 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무지하여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채고 엉뚱한 질문을 한다던지, 문란하다던지, 성적인 배경으로 여성의 가치나 위치를 은연중 판단하면서 하는 성서 읽기는 예수를 남성의 우월과 무오류를 대변하는 가부장제적 권위의 상징으로 하락시켜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상당히 복잡하고 놀랍고 당차고 질문하고 흥미롭고 매력적입니다

 

예수가 여자에게 물을 청할 , 여자는 질문을 함으로써 응답합니다. “어떻게 유대인인 선생님께서 나에게 물을 청할 있는가요, 사마리아인인 여자에게.” 

 

단도직입적이며 철저하게 정당하고 타당한 질문입니다. 사실, 맞는게, 예수가 매우 퀴어한 (관습과 판이하게 다른) 도움의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왕국으로 나뉘어졌던 때로부터 당시까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를 혐오해온 사실은 아실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전의 북쪽 왕국에 모여 살고, 유대인들의 이전의 남쪽 왕국에 거주하며 그룹이 서로를 몹시 싫어하였습니다. 550 동안 쓰디씀의 벽이 양쪽에 세워졌습니다 .누가 적합한 왕위 계승인가에 대해서도, 누구의 예배 장소가 옳은 것이냐에 대해서도 싸웠습니다. 이렇게 쓰디씀의 벽들이 제도와 구조가 되어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아이덴티티 깊숙히 접목되었죠. 누가 누구를 만날 있고, 누가 누구와 이야기 있고, 이런 것들이 나이, 젠더, 사회 경제 계층, 종교에 따라 결정되던 시대에, 유대인이라면 사마리아인이 있는 방향으로는 눈도 한번 흘기지 않던 시대에, 예수가 이토록 퀴어한 말걸음 했으니, “물을 있겠느냐 유대인인 예수가 여자인 사마리아인에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으니,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은 사실 상황 분석을 것이죠

 

예수가 그녀에게 화난 표정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례하게 권위적이고 명령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을 테니,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신의 필요에 정직한 예수의 접근 시대에서 나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본연의 인간성, 인간애, 신적인 속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존중을 표현하면서

 

그리고 예수가 물을 있겠느냐 도움을 원할 , 누가 누구에게 없고, 누가 누구보다 우월하고, 누가 누구보다 정상적이고 하는, 550 동안 이어져온 위계와 차별과 혐오의 견고한 토대에 균열이,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디가 예배의 옳은 장소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화해와 변화에 대한 갈망, 목마름을 목마르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지극히 인간다움과 겸손함이, 쓰디씀의 벽을 허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우물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뜨거운, 열정적인, 왔다 갔다 하는 말의 대화는 거의 게임 체인져 되지 않을까. 굉장히 일반적이지 않고. 일어나서는 사실 안되는. 퀴어적인. 누군가에게 흠잡히고 비난 받을게 너무 쉬운데,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가 함께 관습의 바깥에 섭니다

 

말하자면 표면이 딱딱하고 단단하게 닫혀 있는게 아니라 

구멍이 많고 열려 있으며 여러 많은 것들이 가능하고 미끄러운…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순간

 

순간을 정오의 태양 아래 빛나게 것은 

 

갈증이었죠.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여자도 그냥 물을 주면 그뿐이지만,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대화에 참여하며, 예수가 지금 하는 이상한 행동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사람의 말과 밑에서 오래되고 묵은 세계가 움직이고 흔들립니다

 

예수가 말씀하기를,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물을 달라라고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대가 그에게 물을 달라 청할 것이고, 그는 그대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여자는 생각합니다. ‘? 자기가 먼저 내게 물을 달라고 놓고서는, 도리어 나에게 물을 주겠다고? 너무 햇볕이 뜨거워 더위를 먹었나?’ 여자는 계속 생각하겠죠. ‘그는 이상한 진술을 하였으며 뻔뻔하다. 나에게 물을 준다고? 먼저 물을 달라고 사람은 그가 아니었나? 그는 물을 길을 두레박도 물을 담을 물항아리도 없는데.” 

 

선생님, 선생님은 두레박도 없고 우물은 깊습니다. 어디에서 생수를 가져오신단 말씀입니까? 선생님이 우물을 우리의 조상인 야곱보다 위대하단 말씀입니까?” 

 

이것은 여성의 무지가 아니라, 예수가 시작한, 이상한 질문과 응답의 반복을 계속 쫓으는 것입니다. 퀴어한, 특이한 만남에 깊은 진실의 가능성이 있음을 그의 영혼이 감지하고, 확인합니다

 

또는, 사마리아 여자는, “갈망합니다.” 

 

자기의 목마름을 인지합니다. (본래는 예수가 목마르다 라고 말을 걸었는데, 예수의 목마름에 비추어 자신의 목마름을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마름을 느끼고, 갈망이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방금 집에서 물을 마시고 왔을 사마리아 여자가 자기 자신이 목마른지 어쩐지도 몰랐을 있는데, 예수와 만나고, (목마르다, 갈증이 힘들다라고 말하는 예수를 만나고) 자기 자신의 갈망을 만나고, 갈망이 진리와 영을 만날 , 갈망이 이름을 갖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거울과 같습니다. 파아란 하늘처럼 영원하고 시원하고 신선한 , 그렇게 순수하고 훌륭하고 완전히 아름다운 , 하느님의 이상을 마주하고 만났을 , 비로소 내가 갈망하고 있음을 느끼고, 내가 갈망하는 것의 크기가 하늘의 크기 만큼 확장된다는 것을 느낄수 있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복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마름과 갈망이 복음을 만날 , 가슴은 뜨거워지고 밑의 세계는 유동하며, 오래된 것은 물러 나고, 세계에 대한 바람과, 원함과, 궁금함과 희망과 낙관주의가 피어나는 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갈망하므로

열정 가득한 불타는 덤불로 땅에 다가오므로

또한 하느님을 갈망하며

나의 갈증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의 복음 이야기는 오늘 저에게, 그리고 저희에게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같습니다

 

나의 존재 전체를 하나로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진실로 목마른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기뻐하느냐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갈망하느냐 

미래를 향해 질문을 열고

갈망을 느낄 , 하느님의 나를 향한 갈망과 연결되는 그런 순간과 공간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순간과 공간… 

 

갈망이 진실될 수록, 갈망이 세계의 관습과 틀과 규범과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갭이 크고 차이가 수록

상이할 수록

퀴어할 수록

진실된, 순수한 갈망일 수록 

용기가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순간과 공간… 

 

저에게 물을 주십시오.” “저에게 생수를 주십시오.” 

교회가 갈망을 존중하고 용기를 부여하는 우정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전의 바깥에서 그대는 얼마나 멀리 나가 누구를 만나고 찾으러 가는가

식탁의 자리를 마련할 그대는 누구를 식탁 가장 좋은 자리에 초대하고 음식을 나누는가 

 

복음은 가지 질문을 가지고 다닙니다

 

열린 환대가 자주 많이 일어나도록 하고 

우리의 갈망이 

나은 세계를 만드는 참여하는, 수분 보유 10, 치아씨드 알갱이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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